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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청룡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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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금(김두영) 2005. 8. 3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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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대웅전...
 
일요일이면 서운산 등산을 한다..그러다 보면 항상 청룡사는 사찰이 맨먼저 있다.
서운산을 여러번 올랐지만 사철안으로는 처음이었다.
사실은 일요일아침이면 우리 사랑스런 와이프는 교회에 가서 째끔 마음에 걸려
절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은 큰맘먹고 한번 들어가 보았다..
항상 절이 있는곳은 조용하고도 편안한 느낌이다.
 
청룡사에 대해 조그만 소개 한다면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안성청룡사동종 (安城靑龍寺銅鍾) 보물 11-4호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
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
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또한, 검은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서 원래는 1674년에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도 매일 행해지는 예불의식 때마다 종을 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音筒)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용 모양의
종을 거는 고리(용뉴)가 있다.
그 아래에 배가 불록한 포탄 모양의 종이 있다.

종신의 표면을 보면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
(破地獄眞言)"을 1줄씩 새기고 그 아래 사다리꼴로된 4개의 유곽(乳廓)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든 4구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패(位牌)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같은 구성법은 17세기 전반기에 정통 승장계(僧匠系)장인들이 주로 썼던 방식이다.
이 종은 숙종 대에 활동했던 승장 사인(思印)이 30대 중반에 지준(智俊)·태행(太行)·
도겸(道兼)·담연(淡衍)·청윤(淸允)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보이는 전통
계열의 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종들 가운데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범종의 연구와
승장들의 사회 및 사원경제구조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룡사삼층석탑 (靑龍寺三層石塔) -  문화재자료   59호
 
청룡사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이.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4장의 판돌을 세워 4면을 이루게 한 뒤,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에 기단에서와 같은 기둥 모양
의 조각을 새겼다. 몸돌의 크기는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로 인해 전체에
흐르던 비례감이 약간 흐트러지고 있다. 급한 경사를 이루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가벼움을 실었으며,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기단과 지붕돌 모서리의 일부가 깨져 나가고,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없어지긴 하였으나,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청룡사를 다녀와서
와이프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오늘 교회가서 기도하는데 기도잘 되었냐고 했더니 ..
무슨 소린지 쳐다 보기에
오늘 사실은 내가 청룡사에 들어 갔었거든 했더니....재미있었던지 웃고 말았다...